1. 개인의 중요성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는 개인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철폐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자에게 있어서도 당사자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독자적으로 개인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회주의는 본래 집단주의가 원칙이지만, 어떠한 사회라 할지라도 개인과 집단 간의 모순적 관계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회발전이나 특정 집단의 발전에 앞서 개인과 개인적 발전이 더 소중한 것일까. 개인의 권리와 자유, 개인의 의지와 행복이 더 소중한 것일까. 데까르트가 ‘생각하는 자아’론을 주창하고,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을 제창한 이후, 근대적 이념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를 발달시켜 왔다.
그러나 이후 산업화의 결과로서 등장한 맑스주의적 혹은 비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이념들은 개인의 가치보다 ‘사회’의 집단적 가치를 우선하는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개인주의 이념에 맞선 사회주의 이념의 발생) 이는 결국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간의 철학적 갈등과 문제를 던지게 되었다.
오늘날에서의 문제 지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현 시점의 집단적 실천의 과정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게서의 개인의 문제와 집단의 문제가 당장 중요한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기에, 본질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첨예하게 부각되는 지점은 과연 집단의 발전을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야 하는가이고, 집단주의 앞에서 개인의 중요성은 기각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단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서로 변증법적으로 연관되며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개인의 중요성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맑스의 사회적 존재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라고 맑스는 규정했다. 즉 집단과 개인이라는 서로 화해할 수 없이 대립되는 관계를 맑스는 “개인은 곧 사회적 존재, 관계적 존재”라고 함으로써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명해낸 것이다. 개인 자신이 이미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즉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사회나 집단도 역시 개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성립되는 실체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결단과 개인적 실천, 개체적 활동이 없이는 집단과 사회의 자기활동, 자기발전은 불가능하다. “만인은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만인을 위하여”라는 사회주의적 구호(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나와 유명해진 구호)는 바로 이 집단과 개인의 대립이라는 문제를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한 사례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사회주의는 오히려 개인을 무시한 집단주의적 편향으로 치달은 것이 아니었을까.
3. 우리 내의 집단주의적 편향
집단주의의 다른 표현은 ‘전체주의’이다. 전체주의에서는 개인의 의사표명의 자유나 정치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낼 반대의 자유, 다원주의가 금지된다는 결정적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국가는 본래 ‘정치적 민주주의’의 최대한의 발전에 대한 정치적 표현이어야 한다. 이에 반해 구소련이나 현재의 중국과 북한은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를 억압하고, 체제유지에 반대하는 다른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억압/통제하는 정치를 펴고 있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지배자계급의 지배를 위한 사회주의일 뿐, 인민의 자유와 권리에 기초한 진정한 집단주의는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일인독재, 일당독재로 역사적으로 타락하였으나, 진정한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곧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의 정치적 표현”일 뿐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독재에서는 정치적 다원주의가 오히려 극대화되어야 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나 정치적 행동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왜곡된 사회주의는 곧바로 우리의 현재의 사회주의적 실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추상적인 집단물신주의로 인해 개인의 활성화와 개인의 투철한 실천적 결단들이 무력해지는 현상, 각 개인이 자기의 투철한 책임의식 하에 과감히 정치적 실천을 수행하기 보다는, 집단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결국은 집단 실천 자체가 공동화(空洞化)되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집단주의의 잘못된 편향이다. 그러면 개인주의의 경우는 어떠한가?
4. ‘개인주의’를 넘어선 개인 중시 사상
현재 단체의 활동가들은 단순한 개인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공인(公人)이다. 공인을 다른 말로 하면 ‘집단적 개인’이다. 공인에게는 개인적 차원보다 집단적 차원이 더 우선해야 한다. 즉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때 공적인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도 역시 중요하다. 공을 우선하지만, 그 후에 사적인 차원의 일을 병행/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공인으로서의 개인의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집단적 개인’으로서의 일이라고 하겠다.
‘집단적 개인’으로서의 단체 활동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개인적 업무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집단적 개인으로서의 ‘개인적’ 실천과 능력 배양이 절실해진다. 개개의 활동가들이 효과적으로 업무를 제대로 해내어갈 때 집단 전체도 발전하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결국 집단과 개개인은 유기적으로, 변증법적으로 맺어져 있고, 상호간에 상승해나가는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 순환과정에서야말로 개인 활동가들의 실천은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개체적 활동 자체가 곧 집단 전체의,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헌신적인 활동가들은 공적인 업무 시간 이외의 자유 시간조차 집단적 활동에, 혹은 집단의 발전을 위한 일에 투여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바쳐 사회발전과 역사발전에 헌신하는 이들 활동가 층으로 인하여 우리 운동의 미래는 한층 밝고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의 역작용에 대해 생각해보자.
5. 집단이 개인들에게 주어야 할 것들
이상과 같이 개인도 집단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지만, 반대로 집단으로서는 집단 구성원 개개인을 위해, 조직 내의 개개인을 위해서 배려하고, 보듬어 안고, 안정된 자기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주어야 할 것이다.
집단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들은 묻는다 -- 집단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는가? 내가 집단을 위해서 노력할 만큼 집단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집단 속에서의 나의 활동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가? 만일 어떤 집단이 그 구성원에게 의무만을 상기시키고 충분한 활동 공간의 제공이라든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터전의 제공이라든가, 권리의 극대화, 구성원의 참여의 극대화를 충분히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거기서는 개인과 집단 간의 모순이 적대화되고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되고 말 것이다.
그가 누구든 간에 각 개개인은 소중한 존재들이다. 더구나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운동을 하는 개개인의 헌신적인 실천은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역사 발전에 소중한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가 개인보다는 집단의 차원에서 많이 벌어지곤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개개인에게도 정치적 혼란과 동요, 불협화음 등이 발생하곤 한다.
-- 문제의 해결은 집단적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내부비판의 과감한 전개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 개인들 간의 유기적 의사소통의 질적 강화, 그 심화에 있지 않을까. 개인과 집단 사이의 모순, 불일치를 넘어 나아갈, 조화로운 새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05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