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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에 빠진 자본의 탈출구,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2회] 비정규노동 확산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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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취재팀 cast@cast.or.kr
    “노동조합 무력화가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1998년 8월 14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8월 18일, 경찰병력 95개 중대 1만 2천여명이 전국에서 울산으로 몰려들었다. ‘태화강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경찰만이 아니다. 경찰이 둘러싼 현대자동차 생산현장에는 노동조합원과 가족들 4천여명도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취재진 수 백 명까지 몰려들어 전 국민의 귀와 눈이 쏠린 울산에 18일 저녁 급히 나타난 사람들이 있다.

    국민회의 부총재 노무현 의원, 조성준 의원, 정세균 의원, 조한천 의원, 김명원 노사쟁의지원특위간사, 이목희 노사정위원회 실무간사, 이용범 노사정위원회 대변인. 지금은 대통령이 된 노무현 그 때 의원을 단장으로 한 국민회의 중재단 7명도 8월 18일 울산에 내려왔다. 이들은 8월 23일 울산을 떠날 때까지 노・사 양쪽을 오가며 교섭 상황을 주도했다. 이를 두고 하루빨리 경찰병력을 투입하라고 떼를 쓰던 자본 측에서는, 당사자 자율 협상을 원칙으로 하는 노사 문제에 정당이 나선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언론에서는 협상주체가 노・사・정이 아니라 노・사・당으로 바뀌었다며 비아냥거렸다.

    노동부장관과 노사정위원장이 울산에 내려와 있었음에도 특별히 중재단을 만들어서 울산까지 내려 온 이들이 그 때 어떤 역할을 했을까? 아니 중재단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8월 21일 중재단장이던 노무현 의원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중재단은 처음 내려올 때 노조를 설득해 정리해고를 수용하도록 만하면 사태는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꼼짝 않던 노조를 설득해 정리해고를 수용하게 한 것만으로도 중재단의 당초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민주노총 핵심사업장 노조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서울신문 8월 22일자 3면 기사). 그들 말마따나 노동조합이 조합원 일부를 정리해고 하는 선에서 받아들일 뜻을 내비치자마자, 이를 언론에 공개하고 협상이 끝나지도 않은 23일 서둘러서 울산을 떠났다. 정부와 자본진영을 대신해 울산 현지에서 ‘태화강 작전’을 지휘한 것이다.

    98년 현대자동차 파업 투쟁은 노동진영에서나 정부나 정리해고를 둘러싸고 앞으로 있을 대대적인 격돌을 가름하는 분수령이었다. 민주노총은 98년 대의원대회를 통해 정리해고 협약을 부결시키고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폭력과 탄압 속에 정리해고 저지투쟁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투쟁 전선은 무너졌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외롭게 파업투쟁을 이어갔다. 김대중 정권은 앞서 살펴 본대로 고립된 노동조합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도록 모든 조직을 가동하여 압력을 행사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강행으로 자본과 정부는 정리해고 선례를 남겼다. 이는 노조 유연화를 위한 본격적인 공세였다. 98년 당시 정리해고 합의 후 모습.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김광식 전 위원장은 “노조무력화가 가장 큰 목표였다. 노조에 대해서 주도권을 갖고, 그를 통해서 노동 유연화를 확보해서 언제라도 정리해고하고 전환배치하고, 언제라도 회사 양식에 맞게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확보하겠다는 의도에서 현대자동차노조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정리해고 합의라는 치명적인 선례를 남기면서, 노조원들이 노조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인식과 함께 상시적인 고용불안 압박을 느끼게 됐다”고 덧붙인다. 98년 한 해에만 정리해고 권고사직 등 방식으로 노동자 1만 명이 현대자동차를 떠났다.

    자본의 재생산위기를 노동자에 대한 반격의 기회로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던 달러가 갑자기 빠져나가면서 유동성 부족으로 인해 ‘국가부도사태’에 빠진 나라의 권력을 물려받은 김대중 정권은, 외국자본을 우리나라에 유치하여 달러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외국자본 유치 정책을 유일한 탈출구로 믿었던 김대중 정권은 국제적인 투기꾼인 조지 소로스를 안방에 불러들여 자문을 받는 등 국제투기자본 손아귀에 놀아나 우리나라 기업을 무한정 외국 자본에 팔아 넘겼다. 국제투기자본이 요구하는 대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규제들을 없애고, 상품과 금융, 서비스 산업 등 전 영역에서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했고, 국영기업과 공기업을 외국투기자본과 재벌에 넘겼다.

    김대중 정권은 이 같은 처방이 국가부도사태를 벗어나는 길이라고 강조했지만 사실은 재생산위기에 빠진 자본이 모든 부담을 노동자, 민중에 떠넘기며 탈출하는 방식일 뿐이다.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은 ‘투기자본과 비정규직 양산의 문제점’이란 글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공황적 성격은……빠른 속도로 주기적인 반복을 거듭한다. 자본주의체제 위기증폭에 따라 주기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데 노동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정리해고와 임금삭감은 경제불황이나 경제위기가 낳은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라, 자본이 자신의 재생산 위기를 노동자들에 대한 반격의 기회로 삼는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김대중 정권이 이른바 구조조정 모범사례로 치켜세우며 자랑하던 한라재벌 사례가 전형적이다. 한라재벌 정몽원 전 회장은 계열사인 한라시멘트, 만도기계, 한라건설 자금 2조1천억 원을 빼돌려 한라중공업에 부당지원해 계열사 부도를 불러왔다. 미국 투자회사인 로스차일드는 부도난 계열사를 로스차일드가 만든 가공회사로 넘기고->로스차일드는 국내외에서 자금을 조달해 채권단으로부터 헐값에 부채를 인수한 다음->부채가 줄어들어 재무구조가 깨끗해진 계열사들을 다시 국내외 기업이나 투자회사에 팔았다.

    이 과정에서 외자유치를 조건으로 한라시멘트가 국내 금융기관에 갚아야 할 부채 1조880억원 가운데 6363억 원을 탕감 받았는데, 채권단의 부채탕감으로 깨끗해진 회사 지분 30%를 정몽원 전 회장이 챙겼다. 김대중 정권은 일방적 정리해고에 저항하는 만도기계 파업현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가면서 이를 도왔다. 경찰병력이 짓밟은 파업현장에서 만도기계 노동자 2천4백82명이 연행되었으며 282명은 불구속 입건됐고, 노동조합 간부 등 30여명이 구속되었다. 정몽원 재벌 회장이 떼먹은 돈은, 공적자금으로 메워진 채권단 손실이고, 결국 한라재벌 부실을 우리국민이 사회적 부담으로 떠안은 것이다.

    신자본(유)주의 공세 앞에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경제성장 모형인 케인즈주의는 1970년대 금태환 정지, 고정환율제 파산을 거쳐 유가파동과 공황으로 설자리를 잃었다. 달러 - 월스트리트 체제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것이라고 허영구 부위원장은 말한다. “금융자본론을 쓴 R. 힐퍼딩은 자본주의 공황 형태는 금융공황이라고 했다. 달러 - 월스트리트 체제 아래서 이른바 국제금융기구(IMF)식 구조조정은 금융자본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98년 이후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면서 경제 자주권을 잃고 말았다”. 선진금융기법과 투명경영을 내세워 형식적으로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노동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금융 쪽은 국제투기자본에 의한 피해가 집중된 산업이다. 98년 이후 투기자본이 금융기관을 사들였다가 되팔면서 금융산업 노동자들 6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제일은행 매각 때 명예퇴직을 하며 일자리를 떠나는 노동자들 사연을 담은 ‘눈물의 비디오’는 국제투기자본과 신자본(유)주의 정부가 노동자에게 어떻게 고통을 전가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공적자금 17조 8천억 원을 쏟아 부은 제일은행을 5000억 원에 사들인 뉴브릿지캐피탈은 영국계 은행 스탠다드차타드에 1조 6500억 원에 되팔면서 1조 1500억 원을 남겼다. 외환은행을 1조 4000억 원에 산 미국텍사스에 본사를 둔 투기자본 론스타는 2004년 10월부터 대규모 인력감축을 단행하며 노동자를 내쫒기 시작했다. 명예퇴직의 형태로 외환은행 노동자 473명이 직장을 떠났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경영상황도 흑자 상황이었고 과잉인력도 없는 상태여서 사실상 (사측이) 대상자를 지명한 강제퇴직”이었다고 외환은행 노동조합 김보헌 홍보전문위원은 말한다. 론스타가 되팔 생각으로 노동자를 감원했다는 것이다.

    투기 자본의 기업 사냥에 노동자들이 대량 실직하고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국내 시장주의 관료들은 책임지지 않는다. 외환은행 노조원들이 빗속에서 매각 저지 투쟁을 하고 있다. <출처=외환은행 노동조합>

    473명 정리해고 이후 외환은행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해고 압박과 하루 13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외환은행은 점차 비정규직을 확대해 지금은 30%정도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또 2년 내지 3년 계약도 점차 줄어 1년 내지 6개월 단기 계약 노동자가 늘고 있다. 정규직도 실적으로 바로 연결되는 부서에 집중 배치돼 실적에 따른 고용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정리해고가 끝난 2003년 6월 현재 금융노조가 포괄하는 사업장 노동자 13만 7천명 가운데 비정규직 노동자는 4만 1천명이다.

    구미에 있는 오리온전기는 국제투기자본과 정부 관료가 만들어 낸 합작품이다. 오리온전기는 1999년 대우사태로 워크아웃에 들어가 2003년 5월에 최종부도 처리됐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오리온전기에 공적자금만 3967억 원이 투입됐다. 7000천명에 가깝던 노동자들은 계속된 정리해고로 2005년 말 13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채권단은 미국계 사모펀드 매틀린패터슨(아래 MP)을 최종 인수자로 선정하여 자산가치 1200억 원이 넘던 오리온전기는 600억 원에 팔아 넘겼다.

    인수과정에서 노동자들 고용보장이 중요한 조건이 되자 MP는 3년간 고용을 보장하고 합병, 매각 등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오리온전기를 인수했다. 협상을 옆에서 부추기며 보증까지 선 국무조정실 담당자와 외통부경제통상대사는 정부가 주는 상도 받았지만 끝까지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오리온전기 경영과 노동자 고용보장에 관심이 없던 MP는 곧 바로 브라운관 사업부문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가공회사 ‘오션링크’에 팔았다. 그리고 ‘오션링크’는 오리온전기 청산을 결정했다. 3년간 고용보장 합의를 믿었던 1300명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버렸고, 260여개의 하청(협력) 업체에서 일하던 900여명의 노동자들까지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오리온전기의 청산으로 60여개의 하청(협력) 업체는 아예 폐업해 실직한 노동자만도 700여명에 이른다.

    배태수 금속노조 오리온전기 지회장은 ‘투기자본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이 매우 답답하고 안타깝다.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다. 차라리 현대하이스코 노동자들이 부럽다, 그들은 싸울 대상이라도 있지 않느냐? 우리는 대상도 없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구미 오리온전기에는 배태수 지회장과 노조 집행부 10여 명이 먹고 자며 농성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1주일에 한 번 집에 가는 정도다. 배태수 지회장은 “실업 상태에 빠진 1300여명 노동자들은 갑자기 닥쳐온 실업에 정신적 공황 상태를 맞고 있다. 몇몇은 일용직 노동판으로 나가고 일부는 노점상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닥쳐온 실업으로 충격을 받아 건강이 나빠진 사람도 있다“며 답답해했다.

    오리온전기 노동자가 감사원 앞에서 매각 과정에 대한 감사청구를 촉구하고 있다. 오리온전기는 인수자가 고용 보장 합의문을 휴지로 만들고 1300명 노동자들을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만들어 버렸다. 매각 과정에 개입한 고위 관료는 뭐하고 있는지 노동자들은 궁금해 한다. <출처=민중언론참세상>

    결혼 2년차로 얼마 전 아이를 낳았다는 노동조합 유국상 법규부장은, 아내가 받는 6개월짜리 실업급여는 기간이 끝났고, 자기가 받는 90여 만 원 실업급여로 먹고 산다고 했다. 그나마 유부장이 받는 실업급여도 이번 달까지이다. 오랜 농성 투쟁에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아내와 아이를 처가에 맡기고 1주일에 한번 처가에 들르는데, “처가에 가면 장인 장모 볼 면목이 없다. 결혼할 때 고생시키지 않는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볼 때도 미안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유국상 부장은 “투기자본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게 열 받고 정치인들이 뭐하고 있나 해서 열 받는다. 다시는 론스타나 오리온전기 같이 투기자본에 의한 그런 경우가 안 나와야 한다. 정책에 대해서도 대안이 나와야 한다”며 투기자본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통신(KT)에서는 1997년부터 7년 동안 노동자 24,412명이 명예퇴직 등 방법으로 정리해고 됐다. 97년 1,959명을 시작으로 1998년 3,203명, 1999년 9,335명, 2000년 2,244명, 2001년 1,968명, 2003년 5,712명이 한국통신을 떠났다. 2001년에는 정규직과 직영 계약직이 맡아 했던 전화번호 안내 업무를 모두 분사형태로 돌렸다. 요금체납업무를 담당하던 노동자들도 역시 분사형태로 외주화 되면서 노동자들 500여 명은 고스란히 국민신용정보로 넘어갔다. 계약은 1년이 못되어 파기 되었고 대부분이 실업자로 전락했거나 비정규직으로 한국통신에 다시 입사했다.

    <출처=민중언론참세상>

    사회양극화는 없다. 초과착취가 있을 뿐

    국제금융기구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이를 빌미로 국제투기자본은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이윤확대를 위해 정리해고 등 노동시장 유연화를 골자로 한 구조조정을 강하게 압박했다. 국가부도사태가 계기가 되었지만 설사 달러 부족 사태를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같은 투기자본의 무차별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까? 신자본(유)주의 세계화에 맞서지 않고서 말이다.

    미국 경제학을 ‘선진 경제학'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는 대통령이 두 번 연속 집권하고, 그 밑에 신자본(유)주의 경제 관료들이 버티는 한, 국가부도사태를 맞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도전과 응전이고,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이를 겪어 왔다.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 경제는 신자본(유)주의 세계화 덫에 걸려 자본에 무한한 자유를 주고, 노동엔 노예 같은 예속과 굴종을 강요해왔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추진해 온 노동시장 유연화는, 위기를 맞은 자본이 노동자 희생을 바탕으로 극복하면서 재생산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006년 한국 사회 곳곳은 세계금융자본과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지역으로 치자면 평택 대추리, 도두리이고 사안으로 보자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이다. 평택 대추리, 도두리가 미국이 동아시아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전략적 유연성’을 관철시키기 위한 통로라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은 동아시아 패권 전략을 포괄해 한국의 시장 지배를 강고히 하려는 미국 투기 자본과 신자본(유)주의가 강요해온 개방의 완결이다.

    신자본(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사회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 일본 사례를 들어 보자. 2004년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이후 7년 동안 정규직이 645만 명 줄고 비정규직이 430만 명 늘어 비정규직 비율이 34.5%에 이르러 경제적 손실은, 2001년 한 해에만 세수, 저축, 소비 등을 합해 13조 8천억 엔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노동소득분배율은 1988년부터 1997년까지 9년 동안 15.2%가 늘어나서 1997년에는 62.3%까지 올랐다. 그러던 것이 1998년 이후 계속 떨어져 2004년에는 58.8%까지 내려갔다(한국노동연구원 2005년 5월 노동리뷰 이슈분석 김정우). 2004년 12월 사단법인 금융경제연구소가 주관한 ‘IMF 금융위기 7년 대토론회 - 위기 이후의 한국’ 토론자리에서 허영구 부위원장은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생산성 향상, 이직비용 감소, 노사갈등비용 감소, 내수증대, 저축률향상, 세수를 통한 재정소득증대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정규직 늘어나면서 총노동과 총자본 노동소득분배율이 떨어지고 빈부격차가 커진다. 자본이 가져가는 초과이윤은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초과착취로 나타나고 경기가 나빠지는 순환을 반복한다. 신자본(유)주의 정책을 유지한 채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겠다고 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멍청한 발상이다. 사회 양극화는 없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무한정 착취만 있을 뿐이다. 만일 어딘가에 있을 사회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자본의 무한정 착취에 제동을 거는 수밖에.


    비정규노동의 여러 가지 기록
    94년도에 ‘언론사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모임’ 만들어

    ‘혹시 홍*표 선생 기억나세요?’
    ‘홍 누구요?’
    ‘홍*표 선생이요. 1994년에 한국일보에서 해고됐다고 하던데’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기억이 나네요’
    ‘그 분하고 연락이 될까요?’
    ‘당장은 어렵고 여기 저기 알아 봐야 할 것 같은데...’

    기획 연재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보다가 눈에 들어 온 기사가 있었다. 전노협에서 만들던 ‘전국노동자신문’ 1994년 11월 9일자 기사. ‘기자수첩’에 실린 ‘한 비정규직 해고노동자의 끈질긴 투쟁’이 바로 그 기사다. 함께 일했을 만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만날 수 있을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결국 이 기사가 나갈 때까지 홍*표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다.

    지금이야 비정규직 노동운동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너도 나도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비정규직이란 말조차 생소했을 때 ‘언론사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모임’을 만들고 임금차별과 고용불안 해결을 위해 싸웠다니, 비정규직 투쟁으로는 민주노조 운동이 자리를 잡은 이후 기록상 처음이지 않은가 싶다. 이 기사를 보면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어떻게 오늘의 흐름까지 이르렀는지 궁금해졌다.

    일제시대 ‘십장제도’가 비정규노동

    비정규노동센터에서 펴낸 2003년 4월호 ‘비정규노동’에 부산대학교 신원철 교수가 쓴 ‘간접고용과 규제’란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신원철 교수는 간접고용과 중간착취 폐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를 ‘십장제도’로 보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기부터 건설 현장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십장제도’가 비정규노동의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1950년대에는 인천, 군산, 부산 등 부두하역 분야에서 십장의 중간착취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투쟁을 했고, 국회는 조사단을 파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내하청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 첫 사례는 1974년 울산 현대조선소 노동자 투쟁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서 차별 받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직영 사원은 110원짜리 점심을 공짜로 먹었고, 하청 노동자는 130원짜리 점심을 자기가 사서 먹었다. 1년에 동?하복을 공짜로 받는 직영노동자에 비해 하청 노동자는 이런 혜택도 없었고, 같은 작업화라도 직영노동자는 현대가 경영하는 가게에서 1,400원에 타서 신었지만 하청 노동자는 자기 돈(2,500)을 주고 시장에 나가서 사 신었다’.

    정규직 전환 쟁취도 현대중공업이 처음

    비정규직 노동자(하청)가 정규직으로 전환된 첫 사례도 울산 현대중공업이다. 1987년, 지금 현대중공업으로 회사가 통합하기 이전에 현대엔진, 현대중전기, 현대중공업 등으로 나눠져 있을 때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불을 댕긴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이 투쟁에서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은 투쟁동력의 중심이었다. 당연히 중요 요구사항에 하청 노동자들 정규직 전환도 들어가 있었고, 투쟁 승리로 하청 노동자 10,000여명이 투쟁을 통해서 정규직 전환을 따낸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동운동의 주체 세력으로 보고 그들을 조직하는 사업이 노동운동의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고 난 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된 첫 번째 사례는 서산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노동조합 투쟁이다. 1999년 11월 노동조합을 만든 우주산업은, 계약직 노동자는 조직가입 대상이 아니라는 노동부 해석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동반 파업에 돌입한다. 76일 동안 투쟁을 거쳐 2000년 1월 60여명 계약직 노동자 전원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비정규노동에 관한 연구’가 체계적인 분석으로는 처음

    비정규노동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분석한 논문으로는 1992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펴낸 연구보고서 ‘비정규노동에 관한 연구’가 처음으로 보인다. 그 때 연구위원으로 있던 김성환 동덕여대 교수가 쓴 보고서는, ‘우리산업현장(특히 제조업)이 안고 있는 노동력 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비정규노동부문을 활용할 수 없을까 하는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 보고서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연구 목적이야 어떠하든 이 보고서는 여러 가지 통계를 바탕으로 비정규노동의 유형과 범주를 분류하는 등 비정규노동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뒤 비정규노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중요성을 강조한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같은 연구와 이론적인 접근은, 자본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에게 퍼붓는 이념 공세에 맞서고,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계급에 떠넘기는 정책에 맞선 투쟁으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모색이기도 하다.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 1997년 결성

    그렇다면 현장 투쟁의 흐름은 어땠을까? 모두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비정규직이 스스로 ‘비정규직’이란 이름을 내 걸고 조직을 만든 것은 앞서 이야기 한 한국일보 해고 노동자 홍*표 선생이 ‘언론사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모임’을 만든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 1988년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딱 절반을 받고 한국일보에 들어간 홍 선생은 언론사 노동조합이 단체협약, 규약을 바꿔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가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이 처음 결성된 것을 1988년으로 볼 수도 있다. 1988년에 서울건설일용노조와 포항지역건설노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건설일용 노동자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러나 1989년 4월 전국건설일용노조가 만들어진 것까지 포함해서, 건설일용 노동자들이 조직을 결성한 것은 비정규직 조직이라기보다 업종 노동조합 결성의 흐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기사에서는 첫 사례로 꼽지 않았음을 밝혀 둔다.

    전국적인 형태를 띠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직을 만든 것은 1997년 11월 20일이다. 광주 아시아자동차 하청 노동자, 창원 한국중공업 하청 노동자, 울산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 등이 모여서 만든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 초동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1996년 가을부터 각 지역에서 임금 등 차별대우 시정, 근로기준법 준수, 상여금과 수당 인상, 계약 해지에 의한 부당 해고 저지 투쟁 등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그러던 가운데 ‘광주지역 금속노동조합 용역지회’에 속해 있던 아시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김기일 동지가 전국을 돌면서 하청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1997년 11월 13일 노동자대회에 모인 전국노동자들에게 하청 노동자들 투쟁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 10,000장을 만들어서 뿌렸다. 민주노총 2기 지도위원을 지낸 이일재 선생님과 대구노동정책연구소에서 활동하던 심동진 동지가 이 이 유인물을 보고 연락을 해서 함께 합류했고, 조직 결성을 논의한 끝에 1998년 3월 대구에서 수련회를 갖고 초동모임을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 준비모임’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1998년 5월 비정규노동 간담회 열어

    김기일 동지는 이때를 기억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정규직도 어려운데 무슨 비정규직 운동이냐?’, ‘비정규직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냐?’, ‘비정규직 문제도 정규직이 나서야 해결되는 거 아니냐?’. 대략 이런 반응이 돌아 왔다고 한다. 그나마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을 담당 윤우현 국장과 이화여대 조순경 교수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조직화 과제를 공식적인 사업으로 채택해 주길 꾸준히 요구해 온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 준비모임’은 1998년 5월 22일 민주노총 주최로 간담회를 연다.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해 왔던 윤우현 국장과 민주노총으로 자리를 옮긴 심동진 조직부장이 함께 준비해서 연 자리가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 주체형성을 위한 간담회’다. 이 자리에서 간담회에 모인 동지들은 ‘각 연맹, 지역본부, 단위노조에 비정규직 조직부서와 담당자를 확보하여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사업을 전개한다’는 내용을 비롯해 6가지 사업방향에 대해 구체적인 결의를 해낸다. 그 때 자료를 살펴보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전 노동자의 통일단결 된 노동조합의 미래를 열어 주는 사활을 건 사업이므로 집중적인 역량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내하청, 특수고용직 이름을 내걸고 노동조합을 만든 사례는 여럿 있지만 ‘비정규직’ 이름을 내걸고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1999년 11월 15일 창립총회를 가진 ‘볼보건설기계 코리아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처음이다.
    [특별기획] "비정규노동 실태 2006 - 불안정 노동의 시대" 순서

    1회(6/19) 연재를 시작하며 - 불안정 노동의 시대를 넘어 평등 세상을 향해
    2회(7/3) 비정규노동 확산의 배경 - 자본의 위기, 노동의 위기
    3회(7/18)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하기
    4회(7/31) 비정규직 노동자, 권리의 사각지대
    5회(8/14) 정규직과 비정규직 - 같은 일, 다른 노동자
    6회(8/28) 여성과 비정규노동 - 여성이니까 당연하다?
    7회(9/11) [가상 시나리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8회(9/25) [르포-밀착 취재]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주일 / 영상물 병행
    9회(10/9) 비정규노동과 노동강도, 노동안전
    10회(10/23) 비정규노동과 경제 - 비정규직 노동자가 죽어야 경제가 산다?
    11회(11/6) 비정규노동 문제의 올바른 해결방안
    12회(11/20) [특별좌담] 한국 사회와 비정규노동 / 인터넷 영상생중계


    * 기획취재팀(이용근, 이원배, 신현훈, 조대희, 김수목)
    * 이 기획취재는 한국언론재단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2006년07월03일 18: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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