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학습지노조 서울·경기지역 조합원을 위한 노동강좌>
학습지노조 서울경기본부는 2007년 12월부터 총 8강에 걸쳐 진행한 바 있었던 노동강좌를 다시 새롭게 준비하여 2009년 11월부터 제2기 학습지노조 서울·경기지역 조합원을 위한 노동강좌를 아래와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이 노동강좌는 학습지노조 서울·경기지역 조합원 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것인 바 학습지노조 서울·경기지역 조합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특히 제1기 노동강좌에 참여하지 못했던 조합원께서는 꼬~옥~ 참석하여 주십시오.
- 2009년 11월부터 홀수달(두달에 한번) 둘째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정기적으로 진행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 변경 가능]
-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서울경기본부 조합원 교육 사업으로 진행(서울·경기지역 조합원 교육)
- 다른 지역 조합원, 비조합원, 연대단위(노조, 노동단체 등) 구성원도 참여 가능. 단 참여시 장소, 자료 준비 등을 위해 필요하오니 사전에 연락을 꼭 해주십시오.[학습지노조 서울경기본부 황창훈 010-2222-5264, 여민희 019-253-5073]
제1강(2009년 11월 14일 토요일 오후 3시)/ 한국 사회 노동문제 바로 알기
강사: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장소: 민주노총 서울본부 교육장
(찾아오시는 길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로 나온 후 → 20m 직진후 우회전 → 정보학원 2층)
2강(2010년 1월 9일 토요일 오후 3시)/ 경제위기 시대의 노동자 권리
강사: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장소: 미정
*1강, 2강 노동강좌 강사 소개

하종강
현재 하시는 일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강사, 서울중앙지방법원 조정위원, 노동자교육센터 교육위원
하셨던 일
한겨레신문 객원논설위원,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한국노동교육원 객원교수 등
쓴 책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2007년, 한겨레), 길에서 만난 사람들 (2007년, 후마니타스), 철들지 않는다는 것 (2007년, 철수와영희),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2006년, 후마니타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쓴 책
후퇴하는 민주주의 (공저, 2009년, 철수와영희),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공저, 2007년, 한겨레),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공저, 2007년, 철수와영희),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공저, 2004년, 한겨레), 노동자는 못 말려 (공저, 1995년, 민맥), 한울 노동법 강좌 (공저,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직업병과 산업재해, 예방에서 보상까지 (공저, 돌베개), 알기 쉬운 산업안전보건법 해설 (공저, 돌베개), 항상 가슴 떨리는 처음입니다 (공저, 사회평론)
강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신 분을 위해 이 공지 맨 아래에 하종강 님을 소개한 월간 <말> 2001년 12월 186호 ‘인물탐구’ 내용을 첨부하오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이후에도 계속 강좌를 준비하여 진행할 예정입니다.
* 문의: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서울경기본부 사무국장 여민희 019-253-5073
학습지노조 서울경기본부
www.eduwork.org
[첨부]
월간 <말> 인물 탐구 (2001. 12.)
"노동자들이 제 삶을 지탱해줍니다."
-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고동우 kow@digitalmal.com

매달 10일경이면 난 그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선생님, 원고 언제 주실 거예요?"
몇 달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노동상담" 코너 [하종강에게 물어보세요] 원고를 부탁하는 것이다.
"어… 그래요. 깜빡했네. 오늘밤 안에 줄게요."
그러나 그 "약속"은 늘 지켜지지 않는다. 시간에 맞춰 다시 전화를 하면 어김없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미안해요. 제가 지방에 와 있거든요. 내일 새벽에나 도착해요. 내일 오전까진 꼭 보내줄게요."
이렇게 말해 놓고선, 그는 또 하루를 거의 비슷한 이유로 넘기곤 한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기자는 한 필자에게 "왜 그리 깐깐해요!"라는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난 그에게 불평하거나 "빚 받아내듯" 원고독촉을 하지 못한다.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왜 약속된 원고를 "깜빡" 할 수밖에 없는지 나름대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년에 3백회 이상 다니는 노동교육
지난 11월 1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한울노동문제연구소에서 하종강 소장과 마주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 한 달에 몇 번 정도 강연을 나가는 거예요?
"그런 거 수치화하면 노동자들에 대한 모독 같아요."
원고마감 단골 "지각대장"의 항변으로 받아줄 겸, 대체 얼마나 많은 강연을 다니는지 알고 싶어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이거다. 하는 수 없이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다이어리를 빼앗아 확인해 봐야 했다. 펼쳐 보니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까맣다. 어떤 날은 한 번, 어떤 날은 두 번, 세 번. 그렇게 최소한 한 달에 25∼30회, 1년이면 3백 회 이상 그는 강연을 다니고 있었다. 1주일에 하루 정도를 제외하곤 노동자들을 만나는 일에 거의 모든 시간을 쏟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잠시 후 난 더욱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일정은 어떻게 잡는 거예요?
"제가 미리 준비하고 계획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노동조합에서 요청해 오면 하나하나 일정을 잡는 거예요."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휴대폰을 꺼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 역시 꺼놓으라는 요구를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상당히 방해가 되는 게 사실이지만, 그에겐 한 통 한 통이 너무나도 소중한 전화임에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 그래요. 잘 지냈어요? 그런데 어떡하지. 그날 내가 지방에 강연 가야 하는데. 미안해요. 다른 날 해야지 뭐."

빠듯한 일정 때문에 완곡히 거절해야 하는 강연요청까지 합하면 그는 아마도 1년에 1천 회 이상 강연을 다녀야 할 것이다. 무슨 대학교수도, 변호사도, 박사도 아니고 그 흔한 자격증 하나 없는 하종강을 노동자들은 대체 왜 그리도 "애타게" 찾고 있는 걸까. 직함이라곤 직원 두 명이 함께 일하는 한울노동문제연구소의 소장, 그리고 그나마 좀 번듯한 게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판담당 공익위원 정도인데 말이다.
그 해답은 아무래도 진보운동진영 내에서 "정설"처럼 떠다니는 소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무슨 주제든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하종강이 하는 걸 들어보라." "안티조선" 강연으로 바쁜 우리 {말}지 정지환 기자도 노동자들 대상으로 강연을 갔다가 한 노조 간부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단다. 하 소장에게 이 이야기를 직접 해줬더니 그는 "20년 하고 이만큼도 못하면 바보"라고 받아친다.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잘한다고 하지만, 20년이나 했으니까 당연히 이만큼 하는 거죠. 언젠가 교육을 한번 갔다가 어떤 아줌마인데, 그 노동자가 이러는 거예요. "아유, 교육을 잘하니까 구두까지 예뻐 보이네. 어쩜 그렇게 신발도 듬직하게 잘 생겼어." 하하, 그래서 전 그랬어요. "어휴 아주머니, 아줌마도 20년 하면 이만큼 못할까요." 그랬더니 아줌마가 이렇게 말해요. "그래, 그거 말 된다. 나도 공장일 한 10년 했더니 눈 감고도 해." 하하, 그러더라구요."
그렇다. 벌써 20년째다. 하종강은 대학을 졸업한 82년부터 인천 도시산업선교회가 운영하는 "일꾼자료연구실"에서 노동자들의 정서·욕구·일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익히고, 그걸 체계적으로 정리해 교육자료를 만들어서 작은 소모임 공간에서부터 노동교육을 시작했다. 그 뒤 마음먹고 목적의식을 갖고 "노동교육 전문가가 되어야지" 하진 않았지만, 어찌어찌 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물론 다른 "심각한"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글 뒷부분에서 설명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무리 20년을 해온 "전문가"라 하더라도 그의 강연을 들은 노동자들이 이렇게 "뿅 간다"면 좀 "심한" 것 아닌가?
노동조합원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전공련(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대의원대회 때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제 자신은 물론 그 자리를 채운 2백여 명의 동지들이 많은 감동을 받았고, 공무원노조 건설의 당위성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주옥 같은 강의내용을 참가자들만 듣기엔 너무나 아까워 제가 있는 곳에 모시고자 합니다. 다른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겠지만 하 선생님의 강의를 최우선으로 듣고 싶은 게 개인적인 심정입니다."(모지역 공무원직협 간부)
"선생님 강의를 듣고 엄청난 감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동안 노동조합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선생님 강의를 듣고 한번 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당연시했던 모든 일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니 모두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제게는 노동의 가치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노동조합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김○○, 모노조 조합원)
"선생님 강의를 경청하고 매우 감명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나라가 터부시하는 노동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워 주셨고,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명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선생님이 말하길 자기는 조합원이면서도 늘 주눅들어 있었는데, 선생님 강의를 듣고 어깨가 쭉쭉 펴지는 것을 느꼈답니다."(최○○, 전교조 조합원)
"소장님 명강의에 대한 조합원들의 칭찬에 우리 노조 집행부의 어깨가 우쭐해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조합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었다고 뿌듯해하더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전국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박○○, 모노조 간부)
모두 그의 개인 홈페이지 "하종강의 노동과 꿈"(www.labordream.net)에 올라온 글들이다. 개중에는 더 "심한"(이를테면 마치 하종강을 "조폭" 형님 대하듯 하는 글부터 진한 애정표현까지) 글도 많지만, 조금 얌전한 것만 모아본 게 이 정도다.

노동조합을 "집단이기주의 세력"이라고, 나아가 자기 이해만을 위해 "반개혁"을 일삼는 집단이라고 몰아붙이는 정관계·보수언론·일부 시민단체 나으리들이 보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조 한다고 어깨가 펴진다니? 자랑스럽다니? 게다가 공무원노조의 당위성까지 재정립해? 그러나 하종강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원래 이기적인 거예요. 노동자들은 어떤 경제원리를 이해해서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고용안정을 요구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항상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돼 왔어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올바른 처방이 되었어요.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은 자본주의의 모순적인 억압구조를 공고히 하는 쪽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평등한 구조로 개선하는 동력이 돼온 것이잖아요. 그건 고대 노예들이 해방되기 위해 주인을 칼로 찌르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화를 낸 이유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그깟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저렇게 죽어라 싸워?" 그러나 그것은 하종강의 조금 어눌하지만, 진지하고 솔직한 입을 통하면 이처럼 역사의 진보와 평등사회를 향한 정당한 몸부림이 된다. 천박하고 이기적인 요구에서 "유장한" 의미를 지닌 치열한 저항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는 것이다. 하종강이 강연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노동운동가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왜 민주노총, 한국노총은 꼭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에만 신경을 쓰냐는 거죠. 자기는 그렇게 안할 거래요. 하지만 노동운동은 본래 고상한 게 아니에요. 누구는 "요즘 개나 소나 노동조합 다 한다" 이렇게 말하지만, 원래 개나 소나 다 하는 게 노동조합이에요. 투사들만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어릴 때부터 뭔가 "고상한" 가치만 추구하도록 만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완벽한 음모의 시스템이에요, 이건.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은 있는 돈, 없는 돈 뒤에서 다 받아먹으면서 말이죠."
물론 하종강은 "할 만큼 해온" 베테랑 노동운동가들에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경제주의적 시각의 한계에서 머무를 그가 아니다. 우리사회에선 노동조합이 제대로 존립하는 풍토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주로 "초보" 노동운동가, 일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말을 할 뿐, 그 역시 노동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노동운동은 한 달에 몇백만 원씩 받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1백만 원도 채 못 받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지원금·생활비를 적극 지원하는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노동자로 살면서, 똑같이 일하면서 이러한 격차가 생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이 해결할 문제가 그겁니다. 나눠가질 줄 아는 것.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여졌다. 살짝 그의 눈을 바라보니 어느새 눈시울이 빨갛게 불거져 있다.
"그러니까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 20년 일한 사람이 85만원인가 받았어요. 정말 바보들 아니에요?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사람들은 그런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몇 년에 한두 명씩 정규직된다고, 가족들을 그걸로 설득해온 거예요. 하늘 같은 정규직만 되면 이제 고생 끝난다고…. 애들 등록금도 다 나오고, 임금도 세배는 뛴다고. 그런데 노조 만들었다고 어느 날 갑자기 계약해지 당했잖아. 그래서 전국 곳곳의 수천 개 전화국을 다니면서 사람들 조직했다구요. 나도 함께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충북본부에서 노조 설립한다고 나보고 강연 와달래요. 무슨 칠갑산 기슭에 있는 분교라나. 아, 그래서 이 사람들 어떻게 분교 교실 한 칸이라도 빌렸구나 했죠. 그런데 물어 물어 찾아가보니 운동장 한 귀퉁이 맨 땅바닥에 그냥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난 벌컥 화를 냈어요. "이 사람들아, 땅바닥에서 하려면 뭐 하러 여기까지 찾아 들어와. 그냥 아무 데서나 하지." 그때 목이 콱 잠기더라구요. 그 사람들은 그래도… 교육한다고, 모양새라도 갖추려고 분교에 자리를 잡은 거였어요. 맨 땅바닥에…. 그런데 1년에 수십 억씩 조합비를 받는 대기업노조들, 그리고 한국통신 정규직 노조는 대체 뭐하고 있냐구요."
나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종강의 눈물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투철한 사상과 과학으로 무장한 이데올로기적 인간은 아니다"라고 자주 말해 왔다. 다시 말해 자신은 과학적 인식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정권이 바뀌어도 하루 세 끼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고 탄압받는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외국에 갔다 온 한 친구는 내 스케줄을 보더니 "니가 이런 거 안 한다고 세상이 멈추냐, 안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그래요. 하지만 내일 길가에 나 앉아야 할지 모르는 노동자들이 사방에 있거든요. 저는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 받는 것보다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제 자신이 확신이 없으면서 노동자들한테 떠들어대면 그건 "사기"니까, 나름대로는 세계관을 끊임없이 정리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 선택은 늘 과학적 인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감성에 의한 것이었어요."
과학이 아닌 "감성"에 의한 선택
그랬다. 노동자들은 하종강의 말을 들으면 어깨가 쭉쭉 펴진다고 하지만, 하종강은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20년을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숱한 위기와 "유혹" 속에서도 하종강이 큰 흔들림 없이 인생의 절반을 노동자들과 함께 해올 수 있었던 근거였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수많은 운동가들이 "노동해방은 끝났어. 무슨 노동운동이야" 하며, "내가 가장 진보적이고 앞서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게 아닌 것 같다"며 하나둘 노동자 곁을 떠났을 때는 "최소한 고전적인 휴머니즘만은 버리지 말고 살자"고 자신을 다잡았다. 80년대 중반 국제적인 인권운동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해외연수 기회가 왔을 때도 그의 머릿속엔 온통 이 나라 노동자들이 놓인 열악한 현실밖에는 없었다.
하종강의 강연을 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강연엔 늘 그가 직접 겪은 그 생생한 "현실"과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들어간다.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파업현장에서, 집회에서, 평범한 일상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겪은 고통, 울분, 저항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여러 감동들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달된다. 하종강의 강연이 "살아 있다"는 평을 듣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머리에 담긴 게 많아도 결코 하종강이 노동자들과 함께 해온 그 20년 세월을 따라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강의교재는 어떤 체계적인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바로 하종강 그 자신인 셈이다.
그러나 하종강은 이러한 해석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처럼 "편한 길"만 찾아 살아온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대체 왜?
"제가 지금껏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서 조직운동을 하지 못 하는 이유가 있어요. 조직운동은 올바로 가기 위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원칙에 어긋나면 잘라내야 하거든요. 그게 성실환 조직운동가의 자세거든요. 그런데 전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저도 직접 조직에서 후배를 제명해 보고, 내가 제명 당해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80년대 중반에 조직운동을 포기하고, 개인적으로 노동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선·후배들은 한동안 그랬어요. "그만 좀 편하게 살아라. 이제 그 생활에서 기어나와라." 이런 말도 들었어요. "너 지금 굉장히 천사표처럼 착하게, 좋은 말만 하면서 사는 것 같은데, 그건 니가 조직운동을 포기한 부채감 때문이야." 전 이 지적에 공감해요. 나름대로 열심히 교육 다니면서, 노동자들을 위해 시간을 쏟아붓는 건 제가 편한 길을 걸어왔다는 그 부채감 때문도 있어요. 조직운동이 제가 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거든요. 부채감 같은 거로 운동하면 정말 안 되는데…."

"부채감"에서 벗어나지 말자
"부채감"은 인터뷰 중에 그가 가장 많이 쓴 표현 중에 하나였다. 그의 부채감은 비단 조직운동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너무 일찍 규정지은 것"에만 있지 않았다. 인터뷰 말미, 이제 정리할 때가 됐다 싶어 미처 하지 못한 "자투리"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던 중이었다.
- 선생님이 세워 놓은 "작은" 삶의 원칙 같은 거 없어요?
"작은 원칙들,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죠. 많은데, 그 중 하나를 이야기하면 제가 결혼하고 14년 만에 양복 한 벌을 사 입었거든요."
- 14년이나요?
"옷 사입는 데 돈 들어가는 게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런데 욕도 많이 먹었죠. 한 번은 누구더라… 아무튼 누가 죽어서 관을 운구차로 옮기는데 제가 청바지에 빨간 방수잠바 입고 관을 들었거든요."
- 하하, 욕 많이 먹었겠어요?
"그랬죠. 그래도 검은 양복 쫙 빼입고 폼잡는 것보다 음식 날라주고, 잔심부름 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운구하니까 갑자기 생각나는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또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80년 5월에, 제가 수배된 학생이었거든요. 그래서 부천 원미동 석유가게에 취업해서 숨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그렇게 숨어서 석유배달을 다니던 그때… 골목에서 중국음식점 철가방 소년을 만나면 즐거운 수다를 떨기도 했던 그때에… 다방에 석유배달을 가서 다방 종업원들과 희희덕거리기도 했던 그때에… 한가할 때면 서점에 들어가 만화책을 수십권씩 키득키득 웃으며 읽기도 했던 그때에… 나의 친구 김의기(당시 22세, 서강대생)가 광주학살의 진상을 폭로한다며 종로5가 기독교방송국 8층 난간에서 아스팔트 위로 투신했어요. 그때 유인물 제목은 이랬어요.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군사정권이 수백, 수천 명을 죽이고 있는데 동포라는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죠. 그런데 김의기의 장례식을 치렀던 선배가 몇 달 후 저를 만났을 때 이러는 거예요. "똑똑한 놈들은 다 숨어버리고, 멍청한 놈들만 나와서 장례를 치렀다. 애새끼들이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의기 관을 운구할 놈이 없는 거야. 너는 임마, 나쁜 놈이야.""
하종강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김의기가 처절하게 절규하며 아스팔트 위로 몸을 날리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부채감은 아직까지도 하종강을 가위눌리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역사"와 "운동"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그 부채감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최소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 적어도 하종강에겐 그게 "진실"이었다.
어쩌면 하종강에게 "부채감"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어떤 "과거의 사슬"이 아니라 스스로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되묻고 또 되묻는 자신에 대한 "채찍질"인지도 몰랐다. 그는 오늘도 수많은 "부채"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가르치고 지원해 준 노동자들이 싸우다가 해고·구속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 그는 부채를 청산할 생각을 하지 못 한다. 자신이 맛있는 밥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닐 때, 길거리에 나앉아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음을 생각하면, 부채는 열 배 백 배씩 불어나고 만다.
"올 초 그 혹한의 겨울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명동성당 입구에서 인권운동가들이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하는 동안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그들의 손발과 코 끝이 동상으로 문드러지는 동안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노숙투쟁을 밥먹듯이 하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과는 마음 깊은 곳에서라도 함께 울었나요? 우리 모두 이 부채감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하종강이 사회진보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이었다. 수많은 진보운동가들이 있으나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하종강은 다르다. 그의 삶 자체가 부채감과의 전쟁,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월간말 2001년 12월 1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