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노동과정 그리고 노동운동
- 삐삐의 정치경제학 서설 -
Information Technology, Labor Process and Labor Movement
- An Attempt for a Political Economy of Beeper Box -
강 수 돌
1. 정보화 문제를 보는 기본 시각
흔히들 21세기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라고 일컫는다.(주1) 많은 미래학자들은
'정보 사회'야말로 "노동해방"과 "노동의 인간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토대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definition는 노동 대중의 탈정치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정치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행
중인 '정보 사회'와 관련하여, 그 반대의 이야기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자 판옵티콘"electronic panopticon(푸코), "20:80의 사회"(마틴 & 슈만)와
같은 진단들이 '정보 사회'가 주는 환상적 이미지를 악몽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이 보기에, 세계화 및 정보화라는 담론discurse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정언명령이나 자연필연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본의 범지구적 축적과 지배를 위한 전략적인 의미를 강하게 띠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정보화 과정이란 단순히 정보 기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초일류, 범지구적 무한 경쟁, 국가경쟁력 강화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함께 자본의 노동에 대한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적 공격의 상징물이라고 하는
보다 큰 맥락context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 관련성 속에서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하나는 정보화 과정이 노동시장, 노동과정 및 일상생활에
주는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도 정보화라는 변수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변수이거나 상수가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세력관계를 반영하는
종속변수이자, 자본에 의해 노동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매개변수로서 파악된다.
왜냐하면 정보화 과정이 노자간 세력 관계를 반영하는 특정한 시기와 국면에
집중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1987년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자동화 물결과 함께 정보화 과정이 강도높게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즉
본인은 '왜 하필이면 특정한 시기에 정보화가 강력히 이뤄지는가'라는 문제 의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과연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자본에 의한 정보화
공격을 어느 정도까지 거꾸로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여기서
정보기술은 결코 가치중립적이거나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그
활용의 주체만 바뀐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적으로 유익하게 전환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 문제는 보다 깊이있는 토론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2. 정보화 과정이 노동자의 삶에 주는 영향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개별자본들이 끊임없는 축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자본이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골치거리는, 자신의 축적을 위하여 다른 개별 자본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면서도 이 경쟁의 압력을 최소로 줄여야만 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개별 자본들은 크게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게 된다. 그 하나의 자본 전략은
시장, 기술, 금융 등을 독점화하는 것이다. 개별 자본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기술 독점을 이루어 시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정보통신 산업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적 거대 자본이
당면한 축적 위기accumulation crisis의 탈출을 위해 세계적 군산복합체, 특히
미국의 초국적기업의 지배적 구조 하에 그 독점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다(H.. Schiller; 추광영 1997 참조). 그래서 이미
범지구적으로 통신, 정보, 전자, 컴퓨터 산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1993년까지 미국에서만도 1,940억 달러, 아시아에서 1,636억 달러, 유럽에서
1,400억 달러 등 총 5,000억불이 넘는 새 시장이 창출되었다. 2000년까지는 각종
기기, 소프트웨어, 부품 등을 합치면 약 5조에서 7조 달러를 내다보는 거대한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측된다.(주2) 한국에서도 정보통신 산업은 산업은행 예측에
따르면 2001년까지 총 152조원(약 180억 달러) 규모가 되어 총산업생산의 20%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추광영 1997 참조).(주3) 그러나 거대 독점기업들은 그들의 독점
이윤을 위해 정보통신 기술의 특허권과 지적 재산권을 이미 세계적으로 관철시켜
놓았다(우루과이 라운드).(주4)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편에서 노골적으로
'시장자유주의'를 주장하고 있다(1995년부터 WTO체제의 출범).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정보 사회'란 것이 결코 우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자본 전략은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제
아무리 탄탄한 자본력과 독점적인 기술 및 높은 시장점유율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어떤 개별 자본이 인간의 살아있는 노동을 자신의 통제 아래로 확실히
장악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순조로운 축적 운동을 계속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따라서 개별 자본은 상품의 형태로 구매한 노동력, 다시 말해 이른바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에 대해 온갖 기법을 동원하여 능력개발과 동기부여를 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유용한 노동 능력과 왕성한 노동 의욕을 개별 자본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의 살아있는 노동이 (가변)자본으로 순조로이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자본A : 개별자본B의
경쟁이란 곧 개별자본a/개별노동a : 개별자본b/개별노동b로 구체화시킬 수 있고,
이것은 또다시 노사관계A : 노사관계B로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개별자본들 사이의 경쟁이란 과연 어떤 개별 자본이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확실히 장악하는가, 즉 그 누가 노사협조적인 분위기를 가장 장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경쟁을 뜻하게 된다. 이 경우 개별 자본A는 특정 기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 범위를 넓혀 특정 나라(민족국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즉 A국 자본 :
B국 자본 = A국 노자관계 : B국 노자관계로 구체화시켜 분석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990년대의 세계화 물결과 더불어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이데올로기적 공세 속에서 각 나라별로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평화와
노사협력이 강조되는 까닭을 잘 설명해 준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자본 전략의 기둥에서 두 번째 기둥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지배력 강화는 단지 노동과정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과
일상생활까지도 포함하는 전사회적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아래에는 정보화가 노동시장, 노동과정, 일상생활 등 노동자 삶의 전체 과정에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2.1 노동시장의 변동 - 고용관계와 임금체계
자본에 의해, 또 자본을 위해 진행되는 자동화 및 정보화, 이를 통한 산업구조
조정 및 경영합리화가 노동시장에 주는 변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은
아마도 "20:80의 사회"(마틴 & 슈만 참조)라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앞으로 지구촌 사회에서 20%의 사람들은 안정된 일자리와 많은 소득, 그리고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겠지만, 나머지 대다수인 80%의 사람들은 실업자
아니면 불안정한 일자리, 낮은 수입, 그리고 열악한 생활조건 속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야 한다는 진단이다. 그것은 자동화 및 정보화(물리적 작동,
수치화=디지털화된 정보의 기억, 정보의 비교, 판단, 예측, 제어 가능성의 증대)가
인간의 육체적 노동뿐만 아니라 정신적 노동까지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주5)
자본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한 조건일 때 꼭 필요한 기능을 지닌
극소수의 충성스런 노동력만 확보하면 경쟁력상의 우위competitive advantage를
쉽사리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정보화(표준화, 통일화, 객체화)를
통하여, 노동하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집단적 행위로부터 유래되는 가치증식
과정상의 여러 "장애물"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장기
실업자가 대량생산되며, 동시에 불안정한 일자리들이 대량생산된다. 이미 이러한
"노동사회의 위기" 진단은 우리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통계청의 <1997년 2/4분기 고용동향> 자료에 따르면, 계약기간 1년 미만의
임시직 근로자 수가 사상 처음으로 6백만 명을 돌파하여, 총 1천 3백만 노동자 중
45%를 넘게 되었다. 그렇다고 계약기간 1년 이상의 상용근로자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노동부 발표(1997. 5. 18)에 따르면 지난
1990년 이후 1996년 상반기까지 정리해고(명예퇴직 포함)된 사람들은 모두 약 6만
3천 명으로 나타났다. 해마다 평균 1만 명이 정리해고되고 있는 것이다. 급속한
정보화의 진전에 따라 생산직, 사무직, 관리직 할 것없이 극소수의 핵심 노동력
이외에는 "퇴물" 취급을 받으며 '산업예비군'의 대열로 속속 편성되고 있다.
게다가 협소해진 노동시장으로 인하여 20세에서 24세에 이르는 젊은층은 갈수록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해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는 젊은이들은
수십만 명인데, 안정된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예컨대 1998년에도
32만명의 대학생이 졸업할 예정인데, 새 일자리는 8만 정도밖에 제공되지 않을
전망이다. 다시 말해 대졸자의 20% 정도는 확실한 일자리를 가지게 되나 나머지
80%는 실업자나 불확실한 일자리를 가져야 한다.
<표 1> 노동자의 내부구성 변동
(단위: 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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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96.
2/4 97. 2/4
------------------------------------------------------------------------------------------
임금노동자 10,950 11,349 11,568 11,751 12,297 12,736 13,043
13,063 13,320
상용직 5,939 6,256 6,607 6,900 7,110 7,389 7,378
7,409 7,262
(54.2) (55.1) (57.1) (58.7) (57.8) (58.0) (56.6)
(56.7) (54.5)
임시직 3,171 3,263 3,189 3,133 3,420 3,546 3,868
3,853 4,135
(29.0) (28.8) (27.6) (26.7) (26.3) (27.8) (29.7)
(29.5) (31.0)
일용직 1,840 1,830 1,772 1,718 17,67 1,801 1,797
1,801 1,923
(16.8) (16.1) (15.3) (14.6) (15.9) (14.2) (13.7)
(13.8)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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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상용직: 노동계약 1년 이상
임시직: 노동계약 1월 이상 - 1년 미만
일용직: 노동계약 1월 미만.
* 자료: 통계청, 한국통계월보.
노동시장의 변동과 관련, 재미있는 현상의 하나는 삐삐나 핸드폰의 광범위한
확산(주6)으로 서울의 남대문 시장이나 청계천 시장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새벽녘의
'인력 시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거리를 찾곤 했으나 이제는 삐삐나 핸드폰을 소지한 채
가만히 방이나 대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어딘가에서 사람이
필요하다고 호출하게 되면 재빨리 달려 나가게 된다. 이러한 '호출
노동자'(Just-In-Time Workers)들은 서울 용산전자 상가나 부산의 국제시장,
그리고 대부분의 식당업이나 유흥업소, 건설업 등에서 손님과 일의 수량이나 구매
물품에 따라 서비스(작업)를 즉각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에 특히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1996년 노동부의 비공식적 조사에 따르더라도 이러한 노동자의 수는 20만
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6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끌어 모아 컴퓨터에 이름과 특성, 연락처를 저장시켜 두었다가
사업체의 인력 요구에 따라 파견의 형식으로 사람을 보내는 인력 용역 회사 또는
인력 파견 업체들이 많이 생겨 1996년 현재 약 4,000개소 이상으로 늘어났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전인 1986년과 비교해볼 때 호출을 받고 파견을 나가 일을
하게 되는 노동자의 수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동자를 관리하는 인력 회사들의 수가
1991년에만도 이미 3배 이상 증가하였다(재경원의 한 보고서). 이러한 업체들은
호출기와 핸드폰만 갖추면 별도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무실이나 비서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이른바 '걸어다니는 사무실'walking office이 가능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집안에 앉아서 전화, 팩스, 컴퓨터 통신망만을 이용하여 인력
사업을 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가상 기업virtual firm, 가상 조직의 가능성은
훨씬 증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인간적
요구조건을 호소할 상대도 구체적으로 만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를 호소하기
위한 자주적 조직체의 결성도 거의 불가능해진다.(주7) 한마디로,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시장에서부터 '집단적 주체의 해체'를 통하여 그 '보이지 않는
주먹(권력)'invisible fist(power)을 무한정 강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주8)
<표2> 전세계 무선전화 증가추이
(단위: 백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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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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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자수 136 205 317 491 761 1,179
신규가입자수 50 72 112 174 270 418
후대단말기 판매대수 65 94 146 226 351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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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financial Times, 1997. 8. 13.
뿐만 아니라 자본은 지금까지 노동시장에서 연공주의 seniority system (근속연수,
나이)를 기초로 하면서도 노동조합과 단체교섭 collective bargaining을 통해
결정되던 임금체계wage system도, 정보화의 진전과 더불어 능력주의 내지
성과주의로 변동하면서 단체교섭 대신 인사고과personnel assessment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다. 예컨대 삼성데이타시스템에서는 1996년에, 노동자의
능력과 성과를 평가하여 임금수준을 결정하는 연봉제를 도입하면서 '5% 이론'을 그
근거로 삼았는데, 그것은 조직의 이윤증대에 실제로 기여하는 사람은 불과 5%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95%는 들러리이거나 기생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성과
평가를 바탕으로 5%의 극소수에게는 후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하나, 나머지에게는
박한 대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날히 변동하는 정보통신 기술
환경 아래서는 더 이상 노동자의 근속연수나 나이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조건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적응하여 따라갈 수 있는 능력과 높은 성과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 자질의 노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기 때문에 성과와
능력 위주의 임금체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각 기업에서 이뤄지고 있는
포괄적인 인사정보시스템personnel information system이나 각 도시별
인력은행manpower bank의 구축은 모든 인적 자원의 개인적 특성이나 작업 성과,
감독자에 대한 태도, 동료관계, 조직 활동까지도 순식간에 파악하고 통제가능하게
함으로써 자본의 현장 장악력을 높여 준다. 앞서 말한 '호출 노동자'들은 시간당
또는 작업 건수당 임금을 받기 때문에 아예 단체교섭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민주노조 운동에 의해 축적의 위협을 받은
자본이 정보화 공세를 매개로 산업예비군을 대량생산하고 동시에 교섭이 아닌
평가를 위주로 하는 임금체계로 전환함으로써, 민주노조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노동공급의 독점력과 그를 통한 노조의 파워를 꺾어보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2 노동과정의 변동 - 노동의 성격과 노동통제 방식
우선, 정보화는 노동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한편으로는 노동을 더욱 추상화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을 더욱 유동화시킨다. 노동의 추상화는 인간 노동력의
감각과 솜씨, 판단과 예측 등에 의존하던 노동 형태가 자동화나 정보화(디지털화를
통한 기억, 연산, 통제, 반복의 가능성)로 인하여 컴퓨터나 로봇, 센서 등 전자
제어장치를 위주로 하는 쳬계로 전환됨으로써 발생한다. 예컨대 미국의
AT&T사에서와 같이 한국통신Korea Telekom에서도 컴퓨터화된 목소리 인지체제의
구축으로 수천 명의 전화교환원들을 대체하였다. 정보화가 이뤄지면 작업 과정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부호화, 수치화(디지털화)되고 계산되며, 비교 및 평가되어 통제
메카니즘으로 즉각 되돌아온다. 노동자는 프로그램을 하거나(주9) 매뉴얼에 따라
단추만 눌러 주면 된다. 더 이상 손작업이 필요없는 생산직 노동자는 물론이고,
많은 사무직, 관리직 노동자들도 이런 식으로 추상화된 노동을 '속도감있게'
수행해야 된다. 정보화가 진척된 노동은 얼핏보면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파편화되고
불구화된 노동을 더욱 부분적으로 만들어 노동자가 전체 생산과정에 대한 이해를
도저히 할 수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단 1초도 길다 하고 급속히 움직여야 하므로
노동강도 강화, 스트레스 증가, 그리고 VDT 증후군(견경완 장애나 시각 장애,
두통, 생리 이상 등)같은 새로운 직업병까지 발생시킨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직접
쇠나 나무를 다루고 고객의 이름을 쓰거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몸으로 느끼고
대화하고 반응하던 그런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대부분이
컴퓨터와 그 작동자만의 관계로 전환된다.(주10) 그 결과 각종의 빈 틈pore이
제거되고 자본의 생산성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된다.
경기도 군포시에 있는 전자부품업체 성문정밀(주)은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을
효율적으로 운용,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 회사는 지난 해 수주.생산.출하
등에 걸친 150종의 업무처리단계를 정보화와 더불어 단지 35종으로 줄여, 한 명의
담당자가 일괄처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 결과 1주일 걸리던 납기일을 하루로
단축시켰으며 제품 생산주기도 종래 7일에서 2.5일로 줄였다. 불량률도 5분의 1
이하로 낮췄다. 성문정밀은 이에 힘입어 1997년 상바니 매출이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280%나 올라갔고, 1인당 부가가치생산액도 150% 증가했다(중앙일보,
1997. 10. 16).
노동의 유동화란 예전처럼 어떤 노동이 같은 장소에서 오랫동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화(시간, 공간, 국경의 한계 초월)와 더불어 매우 자주 움직여
다닌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본이 포괄적인 정보망information network의 구축을
통해 범지구적으로 모든 사업체의 생산성이나 경쟁력의 비교를 쉽사리 하게 되고,
따라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지에서 사업을 계속하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본은 이제 지구 전체를 무대로 본사의 위치를 자유로이 이동시키기도 하고, 또
생산과정의 일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폐쇄 후 다른 회사로부터 부품을
조달하기도global sourcing 한다. 그리고 단기적으로 투자비용을 모두 회수하여 그
이동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자본은 설비 가동률을 지속적으로 드높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설비를 24시간 풀가동하기 위해 다양한 교대제도shift system나 절대
노동시간의 연장, 변형근로시간제flexible working time 도입이 이뤄지기도 한다.
두 달 정도의 파업 끝에 1997년 3월에 개정된 노동법은 이러한 맥락에서 노동의
유연한 활용(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선택근로제 등)을 법제화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정보화는 재택근무Telework의 가능성도 증대시키는데, 예컨대
미국에서 텔레워크 노동자는 1989년에 2천 3백만이었으나 1994년에는 약 3천
9백만으로 늘었고, 유럽에서도 약 1천만 명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조은 1997:70
참조). 노동을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자본의 능력은 곧 노동에 대한 자본의 통제력
증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만큼 자유로이 이동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그만큼
자본의 지배 아래 종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노동과정 전체를 정보망information
network으로 연결하여 통제하는 경우, 자본은 노동과정에 대한 현장 장악력을
급속히 증대시킬 수 있게 된다.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정보망은 지구촌 그 어디에
있는 사업장의 구체적인 데이터도 중앙통제가 가능하게 해주므로, 자본의
입장에서는 고도의 분권화와 동시에 고도의 집권화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즉
자본은 세계 각국 또는 한 나라 안에서도 도처에 분산되어 있는 사업장들에 어느
정도의 경영권한을 위임해주고empowerment 서로 경쟁적으로 효율을 높이도록
하면서도, 정보 기술을 통하여 이들을 시간과 공간, 국경을 초월하여 효과적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대우자동차 자본은 정보화와
더불어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인천의 본사에 가만히 앉아서도, 군산의 제
2공장이나 폴란드, 루마니아 합작공장, 인도네시아 공장 등 해외 10여개 현지
공장의 생산성, 품질, 노동쟁의 상황 등과 관련된 데이터를 모두 수집, 평가할 수
있어,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생산입지를 옮기거나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1997년 9월 현재 한국에는 기존의 SK Telekom, 신세기 통신 등 2개
셀룰러사업자 이외에 한국통신 Freetel, 한솔 PCS, LG Telekom 등이 가세, 5개의
PCS 자본이 경쟁에 돌입하였는데, 뒤의 3사는 평균 600개씩의 무인 기지국을
전국적으로 가지고 있고, SK Telekom은 2,500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인
기지국을 유지하고 보수, 관리하는 작업은 '한 손에 핸드폰을, 다른 손에 갤로퍼나
코란도의 핸들을' 잡고 계속 이동하는 용역 사원들이 담당하고 있다. 예컨대 SK
Telekom에서는 현재 약 6,000명의 직원이 있는데 그 중 40%가 넘는 2,500명 정도의
'달리는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지국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보화는
노동력의 대체가능성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의 대체가능성까지도 엄청 높여 주고
있다.
정보화 과정은 노동과정labor process상 노동통제labor control 방식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과거의 권위주의적 형태나 기계적 형태로 표현되는
외재적 통제보다는 제도적 형태나 소통적communicative 형태로 표현되는 내재적
통제가 선호될 뿐만 아니라 가능해지고 있다(cf. Kang 1995). 여기서 제도적
형태란 경영참가 제도나 복지 제도를 통해 노동자를 기업과 동일시하게identify
하여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소통적 형태란 자본이 노동에게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어느 정도의 자율 공간과 의사소통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본의
운동 논리를 노동 스스로 내면화하게internalize 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어떤 기업에서는 컴퓨터 통신망을 통하여
불만사항이나 건의 사항, 기발한 아이디어 제안 등을 아무런 위험 부담없이도 그
조직의 높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제안은 채택되어
포상되기도 하고 불만 사항은 개선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당해 노동자들로
하여금 더욱 그 조직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이른바 '전자민주주의'의 환상까지
가지게 한다. 그러나 반면에 정보기관과 기업이 공유하는 포괄적인
인사정보시스템이나 전자감응장치, 호출기(삐삐), 핸드폰 등은 기업 활동에
거슬리는 행위를 하는 모든 개인이나 조직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실상 더욱
강력하고 신속하게 통제할 수 있다.
노동통제 방식과 관련하여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생산직, 사무직, 관리직을
불문하고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집단적으로 노동이 수행되는 경우에는 팀작업team
work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원래 1970년대에 유럽의 노조들이
노동과정의 자율성 확대나 노동자의 자질향상, 노동의 인간화라는 맥락에서 요구한
것이지만, 정보화(비디오와 컴퓨터를 통한 테일러Taylor식 시간 연구 및 동작
연구의 세련화, 전광판 등을 통한 작업공정 상황의 시각화)와 더불어 자본이
주도로 인력 감축, 노동시간상 빈 틈pore의 축소(주11), 노동강도 강화, 외재적
통제의 내재화, 관리 비용(위계적 경직성 및 중간관리자)의 축소, 노동자의 경험적
지식과 창의성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맥락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보
기술은 한편으로는 대단히 예민한sensitive 특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편으로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시스템적systematic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부 공정의
조그마한 트러블trouble도 전체 조직을 마비시키거나 교란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노동과정 및 관리과정의 정보화가 진척될수록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러한 위험성을 사전에 예방하는 데
동참하도록 만들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주인의식과 일체감, 그리고 원활한
의사소통communication 등이 더욱 강조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팀조직이
발전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화를 기초로 하는 팀작업은
팀구성원끼리 자기통제self control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자본이 생산성과 품질,
작업태도, 노조의 영향력 등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끝으로 정보 기술의 도입은 소수의 남성 노동력이 핵심 노동자층으로, 그리고
다수의 여성 노동력이 주변부 노동자층(단순기술직, 단순사무직, 임시직 등)으로
양극화되도록 하는 데에 더욱 기여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직의
성차별적 속성은 하이테크 도입과 결합되면서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Savage
1992, Probert 1996, 조은 1997:72 참조). 이러한 분열과 경쟁에 입각한
노동통제는 자본으로 하여금 노동 일반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게
한다.
2.3 일상생활 - 속도감과 조급성, 정보중독증과 풍요 속의 빈곤
자본이 스스로 추동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자본으로 하여금 촌각을 다투어
움직이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일상생활이나 일상의식조차 그에
적응하도록 '말없이' 강요된다. 예컨대 1996년 현재 미국에서만도 모두 약 6조
달러의 투자자금이 컴퓨터 망을 통하여 온 세상을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돌아다니고 있다. 재수좋은 투기꾼들은 불과 1분만에 1억 달러를 버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정반대로 순식간에 망하는 투자자도 생긴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정보화(실물생산과 분리된 금융자본 운동의 가능성)로 인하여 약삭빠른 투기꾼들은
초를 다투어가며 수억대의 '이윤 사냥'을 하게 된다.(주12) 그리고 이러한
금융자본의 권력은 10% 이상의 이윤을 투자대상 기업들에게 강요하면서
노동배제적인 경영합리화를 범지구적으로 강제한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증대된 불확실성uncertainty을 매개로 새로운 사업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파생금융상품derivatives 거래이다. 이러한 상품 계약은 1994년 현재 약 12조
달러로 추정되었고, 1999년까지 18조 달러로 성장될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1998년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이어지는 추석
연휴기간을 위한 서울발 항공편 예약이 이미 1997년 10월 21일에 시작되었는데,
부산, 제주, 울산, 여수, 군산 등 주요 노선의 예매 대상 좌석(약 20만개석)이
전화와 PC 통신, 여행사 단말기(CRT) 등을 통한 예매 개시 10분만에 모두
매진되었다. 이것은 무려 60억원의 매출액이고, 앞으로 1년 동안 고스란히
항공사에 들어가는 이자만 해도 최소한 6억이다. 정보통신 기술은 이처럼 엄청난
자본의 운동이 순식간에 이뤄지도록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자본의 급속한 운동 과정은 자본가 자신은 물론, 노동자들, 그리고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조차 '시간은 돈이다'라는 일상의식을 재강화하는reinforce 데
기여한다. 반면에 사람들은 정보망의 확충과 더불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보다 값싸고 보다 빨리 얻을 수도 있다(이른바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의
감소). 그러나 바로 이러한 편리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1분 1초라도 '유용하게'
쓰지 않으면 불안하게 만든다.(주13) 사실 위의 항공기 예매 과정에는 사람들의
조급성(경쟁심)도 크게 작용했다. 이런 식의 일상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향적으로 마음의 여유를 잃게 하고 조급성과 속도감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이 변할 수도 있다.(주14)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정보기술이
가족관계나 친구관계, 동료관계 사이를 친밀하게 연결시켜 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
편리함만큼이나 소원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컨대 호출기나 핸드폰으로 급하게
연락해달라고 호출한 경우에 만일 상대방이 자신의 통신기기를 꺼놓고 있었다면,
응답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은 온갖 추측과 오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자본운동의 속도감이 우리의 생활세계에는 광고와 유행의 일상화로
구현되고 있다.(주15) 정보기술을 활용한 상품 광고가 세계 구석구석으로 침투하여
우리의 욕구구조를 표준화시키고 탈정치화시키고 있다면, 유행과 패션은 그러한
상품 소비의 주기를 단축하고 "제도화"(강내희 1997:166)시키고 있다.(주16)
광고와 유행에 사람들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텔레쇼핑Teleshopping 또는 사이버쇼핑Cybershopping이다. 텔레비젼, 전화, 인터넷
등이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일단 이러한 통신망만 갖추어져 있다면 사람들은 더욱 쉽게 소비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이미 국내에는 롯데백화점, 데이콤의 인터파크, 종로서적 등 3개의
사이버쇼핑몰이 있고, 몇몇 대기업이나 대형백화점, 대형 서점들도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다. 결국 우리들이 생활과정에서 꼭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오래도록
아껴가며 쓰기 보다는, 일회용 상품이나 유행에 중독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좇아가려 하는 생활태도는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습관을 우리가 내면화하고 강화해 나간다면 우리의 생활세계는 더욱
화폐의존적으로, 결국 더욱 자본의존적으로 되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더욱
많은 가족구성원들이 노동시장으로 나가야 하고 더욱 오랜 시간을 자본의 지휘
하에서 충성스럽게 노동해야 할 것이다.
정보화(시공의 초월)로 인한 속도감 못지않게 중요한 측면은 중독성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의 대중화(주17)는 무한한 정보욕의
전제임과 동시에 그 중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지혜를 찾고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정보보다는 상품가치가 있거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음란물에 대한 정보가 더욱 많이,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나아가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가 간직하고 있던 고유의 가치관이나 생활습관, 특유의 문화양식들을
이 정보화 물결이 범지구적으로 단순화, 표준화, 획일화시켜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범지구적 표준화, 평준화 과정은 사실상 자본의 자기증식 이해와 깊이
맞물려 있다. 예컨대 우리가 한여름에 갈증을 느낄 때 예전같으면 샘물을 찾거나
미숫가루를 타 먹거나 오이 냉국을 만들어 마시거나 하였지만, 이제는 갈증이
생기면 단연코 맥주나 코카콜라를 찾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의 바다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세계 각 나라의 사람들은 동일한 매뉴얼을 가지고 동일한 항해를
해야 한다. 이 항해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곳도 가보고 저곳도 가보고 싶어, 원래
자기가 가고자 하던 목적지를 곧잘 비켜 지나간다. 여하튼 만일 유익한 정보를
얻었다면 다음에도 그는 또 이러한 항해를 계속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정보
탐색뿐 아니라 호출기나 핸드폰같은 통신 교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다시말해
정보화(편리성과 유용성)가 가져다 주는 장점은 그만큼 우리들로 하여금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고 '기술 유토피아'적인 환상까지 갖게 한다.
잠재적으로 이러한 정보화의 바다는 국경선이 없고 거의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평등하고 자유로운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심어 주면서
서서히 중독의 세계로 빠져들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통신망 속의 일일
뉴스나 정보 안내판을 들여다 보지 않으면 '뭔가 모르게'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
불안한 심리 상태까지 생길 수 있다. 호출기나 핸드폰, 전자 뉴스나 인터넷이
현대판 족쇄(중독물)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으로는 정보 자체가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정보(권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기고 있다. 특히 정보기관은 모든 정보를 장악하려 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러한 독점적 우위를 바탕으로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 조직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정보 민주주의'라는 기대와 환상에도
불구하고 '정보 독재주의'가 현실화될 수 있다. 이것은 기업 세계에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인사정보시스템personnel information system을 통해 조직체들은
우리들의 신상명세서를 모두 알고 있으나, 우리는 한 기업이 해외에 나가서
열대우림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그리고 토속공동체들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노동력을 어떻게 관리통제하는지, 이윤과 비자금, 로비 자금은 과연 얼마이며
누구에게 주는지 등에 대해 별 다른 정보를 갖지도 못하고 또 가지기도 힘들다.
물론 이러한 점들은 정보화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불균형 내지
자본관계를 철저히 반영하지만, 정보화(작은 규모로도 엄청난 정보를 저장,
중앙집중 가능)의 진척과 더불어 더욱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 예컨대 1998년부터
실시하고자 하는 '전자주민카드' 도입 시도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전자주민카드는
주민등록증에 나오는 개인 신상정보는 물론 보험관계나 연금관련 상황까지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기에(10여개의 개인증명서 정보를 통합하고자 하는 것), 만일
이것이 실행되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보다 철저히 정보 사회에 종속적으로 되면서
권력관계의 불균형도 심화될 것이다. Webster & Robins는 오늘날 정보통신 기술이
현대인의 모든 활동 흔적과 기록을 전자적인 감시상태 아래 남김으로써 기존의
테일러리즘을 생산현장 뿐 아니라 전사회적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고 하여,
"사회적 테일러리즘"(social Taylorism)이라 이름짓고 있다(추광영 1997 참조).
더군다나 앞에서 말한 "20:80의 사회"가 되어 단지 20%의 선택된 사람들이 80%의
사람들(실업자나 불안정고용 하의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사회가 온다면
사회불안은 고조될 것이고,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지배자들은 고도의
감시와 통제기술을 통해 사회안정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도 정보기술의 권력화는 심화될 것이다.(주18) 이렇게 본다면
전자주민카드나 경찰의 신원(or 차량)조회 단말기 또는 개인 정보의 무단 유출과
상품화(예컨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정보 시장에서
거래되어 어느날 기분나쁘게도 어떤 사업체로부터 편지나 광고지를 받게 되는 것)
등은 '사회적 테일러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같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게 나를 항상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살아야 할 위험이
높아진다.
3. 정보화와 노동운동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자동화, 정보화의 문제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끊임없이 논의된
주제이긴 하나, 사실 운동의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명쾌하게 해결된 적은 없다.
그러나 모든 실천이 그러하듯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앞서 논의한 대로 정보화 과정은 초국적 독점 자본이 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지극히 구조적인 불평등 관계 속에서 의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며,
결국은 노동 일반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범지구적인
세계시장world market의 창출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은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기만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정보 사회'의
환상illusion과 끊임없는 사회 진보에 대한 신화myth를 내면화internalize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정보통신 기술이 가져다 주는 유용성(편리함과 신속성,
정확성 등)이 클수록, 그만큼 사람들은 실제로 그 환상과 신화의 내면화 과정에
동참하고 있다. 다만 그 부정적 영향이 최소화되기만을 바라면서. 그러나 대개
이들은 그러한 정보화가 총체적으로 as a whole 사회 관계social relations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해 별다른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이 이런 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과연
정보화의 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분명코 우리는 1800년대의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처럼 '정보기술 파괴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원시 사회'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보기술이
설계, 개발되고 적용, 확산되는 사회적 맥락social context과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이다. 따라서 자본에 의해 독점적으로 설계, 개발되고 자본의 지배
강화와 이윤 증대를 위하여 적용, 확산되는 그러한 과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Quality of Life 향상을 위해 정보통신 기술을 새로이 개발하고 설계하며,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기술 혁명' 자체를
혁신적으로 다르게 이끌어 나간다는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첫 번째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두 번째로 명심할 것은 구체적인 '정보화의 공간'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함께 들이닥치고 있는, 그리하여 이미 대단히 정치적인 각축장contested
terrain이므로, 노동운동의 입장에서는 앞에서 우리가 분석한 바와 같이,
노동시장, 노동과정, 그리고 생활과정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구체적인
모순들concrete contradictions을 정확히 정리해내고 이의 척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노동시장의 분열과 경쟁을 지양해야 하며,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는만큼 노동과정상 사회적 노동시간을 과감하게 단축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삶의 여유를 되찾으며,(주19)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잃어버린 인간 관계를 되찾거나 재구성해야 할 것같다. 궁극적으로는 차별받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으며 자유롭고 여유로운 대안적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세 번째는 범지구적으로 구축되고 있는 정보통신망을 적극 활용하여 좁은 기업별
운동의 틀을 과감히 뛰어 넘어 업종별, 산업별, 국제 지역사회별regional, 그리고
마침내 범지구적인 연대의 틀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정보 교류의 수준을
뛰어 넘어, 다양한 경험의 교류는 물론, 구체적 쟁점에 대한 전략적 입장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상호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는 정보 기관에 의한 차단벽의 설치나 통신검열과 같은 장애물들이 있을 수
있다.(주20) 물론 이러한 통신검열은 강력한 저항을 통해 종식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노동운동 스스로 개방적이지 못하고 내면적 통제를
자행하는 '자기 검열'self-censorship이다. 이러한 자기검열까지도 건강하게
극복하게 되면 통신공간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 예컨대 1993년
초에 미국에서 통신망을 이용한 정치운동 단체인 '앞서 가라 ...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Lead ... or Leave)라는 조직은 회원 1백만 명이 넘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기도 했으며(추광영 1997 참조), LaborNet은 250여개에 이르는
미국내 연맹노조와 국제노동단체, 각국의 연맹노조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LabourNet이 각 나라의 주요 투쟁소식을 지속적으로 전파하여
국제연대를 조직하고 있으며, 캐나다 공공노조도 SoliNet이라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2,200개 지역의 400만 조합원을 긴밀히 연결하고 있다(홍석만 1997). 그리고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인하여 생존의 위협을 겪은 멕시코
자파티스타 농민군은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미국내 대학의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널리 전파하여 세계적 관심과 연대를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과테말라의 펩시콜라
노동자들도 인터넷을 통해 그들의 투쟁을 널리 알려 범지구적 연대를
이끌어냄으로써 마침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홍석만 1997). 한국에서도
1996/7년의 총파업때 '총파업통신지원단'이 결성되어 인터넷과 컴퓨터 통신을
활용, 총 30여개 나라의 노동단체와 정치단체로부터 적극적인 연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이 시도한 '총파업 속보'는 지역별, 영역별로 전개된
총파업투쟁을 활자매체가 아닌 영상매체를 통해 생생히 전달함으로써 날치기
개악된 노동법에 대한 국내외적 저항을 조직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총파업 속보'는 1997 베를린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어 독일 노동운동가들뿐 아니라
베를린 영화제에 참가한 각 나라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홍석만 1997). 그러나 노동운동은 이러한 자본의 흐름에 거스르는
저항운동의 차원을 뛰어 넘어, 굳건한 연대의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율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즉 만일 이러한 범지구적 연대 활동이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세계시장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노동자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종식(지양)시키게 된다면,
범세계적으로 더 이상 지배와 착취가 아닌 연대와 협동의 새로운 사회 관계를
열어제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일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정보기술 혁명'을 이끌어갈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욕구 충족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여 어떻게 분배하고 소비할 것인가에 대해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책임성있는 결정을 내리는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사회적 자원과 자연적 자원을 민주적이고 생태적으로 배치하고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욕구에 맞게 설계, 개발된 정보통신 기술을 적극
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는 정보 기술 자체가 갖는 물신성fetishism을 극복하여, 잃어버린
영성spirituality을 되찾아야 한다. 생각건대 계몽주의, 과학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외재적인 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또
땅(자연)에 대한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났으나, 바로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라는 의식, 즉 영성spirituality까지도 헌신짝 버리듯 훌쩍 내던져
버렸다. 이러한 탈정신화(Entspiritualisierung)(주21)로 인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가 정당화되었고, 또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내면 세계(내재적 자연)로부터 더욱 분리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내면적 자율성을 되찾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지배와 착취, 개발과 남용이 아니라 연대와 협동, 조화와 공생의 관계로 새롭게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정보기술혁명을 통해 인간
사회의 무한한 진보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환상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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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수 돌
(고려대 경상대학 경영학과, 노사관계)
Prof. Dr. Kang, Su Dol
Korea University, Business Administration
Industrial Relations
Chungnam Yonkigun Chochiwon
# 339-700 South Korea
Tel. (0415) 60-1527
Fax (0415) 60-1507
E-Mail: sdkang@tiger.korea.ac.kr
(주1) 여기서 말하는 '정보화'는 넓은 의미에서 쓰이고 있는데, 한편으로 자동화,
산업로봇, 인공지능, 컴퓨터, 모뎀과 PC 통신, 네트워크, 인터넷, 그리고 다른
편으로 텔레비전, 전화, 팩스, 비디오, 디지털 카메라, 멀티미디어, 정보고속도로,
호출기, 핸드폰, PCS(개인휴대통신) 등 여러 정보통신기술의 개발, 적용, 확산
diffusion of information technology과 관련된 경제기술적 과정 모두를 포괄하며,
나아가 우리 스스로 이러한 정보기술의 가능성을 내면화 internalize 하는
사회심리적 과정까지도 포함한다.
(주2) 최근 들어 미국의 통신시장을 두고 공룡끼리의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이다.
미국 2위의 장거리 전화회사인 MCI를 이미 1996년 11월에 브리티시 텔레콤이
인수하기로 했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인수가겨 문제로 차질을 빚자, 미국 4위의
장거리 전화회사인 월드콤이 인수제의를 해왔고, 동시에 미국 3위의 지역전화사인
GTE도 인수 경쟁에 동참했다. 그러자 미국 1위의 장거리 전화사인 AT&T가 GTE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한겨레신문, 1997. 10. 17).
(주3) 1997년 10월 23일 아침에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정보화 정책" 관련,
대통령 선거 후보 입장발표회(TV 생중계)에서도 앞으로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이
(축적의)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라는 데에 5명의
후보(권영길 후보는 나오지 않음) 모두가 같은 의견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미국 중심의 초국적 기업에 의해 추동되는 정보화를 각 나라의 정치경제
지도자들은 거의 무비판적으로 이미 새로운 돌파구라고 '내면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정보화를 추동하기 위한 교육체계의 개편, 행정지원체제의
확립, 인프라 구축 등이 시급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지금까지의 경제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성찰없이 오로지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탈출구를 개발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대안적'
전망도 담고 있지 않다.
(주4) 예컨대 한국의 휴대폰 업체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독점 자본인 퀄컴사에 약
1,600억원이 넘는 로열티(기술사용료)를 지불했으며, 셀룰러와 PCS 등 휴대폰의
부품 국산화율이 30%에 불과해 70%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주5) 제레미 리프킨(1996)도 블루칼라나 화이트칼라를 불문하고 미국의 일자리
4개 중 3가지 정도는 기계에 의해 자동화될 것이고, 이로 인해 21세기 중반에는
현재의 약 1억 2천만 노동자 중에서 억단위의 인구가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주6) 호출기(삐삐)의 경우 1993년 말 현재 265만명이던 가입자 수가 불과 3년만인
1996년말에 4.5배인 1,200만으로 늘었고, 1997년 9월 현재 1,400만 이상으로
되었다. 국민 3명당 1명꼴로 호출기를 보유하고 있어 그 확산 속도는 이미 세계
1위, 인구대비 보급률은 32%로 싱가포르 다음으로 2위, 가입자 수로는 미국,
중국에 이어 3위이다. 또 핸드폰, 씨티폰, PCS 등 국내 이동통신 인구는 이미
500만 명선을 넘어섰다. 이는 1990년 이후 해마다 두 배이상의 증가세를 기록하는
것이다. 앞으로 PCS외에도 CT-2, TRS, IMT-2000 등 새로운 통신전자기기의
보급으로 2000년이 되면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유선전화 가입자 수를 앞지를
것이라 예상될 지경이다.
(주7) 물론 PC 통신상의 '하이텔 동호회'라든지, '붉은 악마'로 대표되는 한국
축구 동호회 등 수많은 동호회의 등장은 이러한 우려에 대한 반증으로 제시될 수
있다. 특히 '붉은 악마' 조직은 강력한 '운동'movement으로까지 발전하여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수도 있는 것처럼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붉은 악마'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정치적이지만,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그외 수많은 동호회들 중,
의식적으로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antagonism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서로 좋은 인간 관계를 맺는 것(물론 이것조차도
매우 중요하다) 이상의 정치적인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쉽다.
(주8) 어느 전산인력 파견근무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맨
처음엔 용역이 뭔지도 모르고, 이것이 인간 판매사업인 줄도 모르고 용역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근로계약서같은 것은 본 적도 없어요. 일은 OO보험회사에서
전산처리 작업을 하지요. 월급은 주는대로 받는 거지요. 맨 처음에 23만원
받았어요. 다른 데 갈 데가 있으면 여기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요. 기회가
없으니가 그냥 다니고 있지요. ... 어떤 회사에 다니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가장 당황스럽지요. 식구나 친한 친구들은 내가 용역회사 사원인 줄 알아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물으면 그냥 내가 매일 근무하는 OO보험회사에 다닌다고 말해
버리지요."(노기연 자료집, <고용유연화>에서 재인용)
(주9) 사실 이러한 프로그래밍을 포함한 설계, 모델링 등 비교적 창의적인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남성 노동자들이다. 앞으로는 이러한
작업들도 '창조적으로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수행될 수도 있다(라키토프 1996:270
참조).
(주10)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컴퓨터 생명체가 탄생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정서적인 세계, 열정, 열망 등을 소유하는 지능기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라키토프 1996:270).
(주11) 노동시간은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일하게 중요한 살아있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돈을 벌어주기 때문이다. 더 많은 노동시간은 더 적은 손실
또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본은 그 시간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노동을 위해 스지 않는
어더한 시간도 자본에게는 죽은 시간이다(해리 클리버 1996:182).
(주12) 일례로 미국의 금융투자가 조지 소로스는 1992년에 영국 파운드화를 상대로
투기성 자금을 운영하여 영국 은행을 거덜내고 단번에 10억 달러를 벌었다.
(주13) "(정보화는) 사회구조를 철저하게 변화시키며, 삶의 틀, 가치, 위신,
대중적인 사회의식을 본질적으로 변형시킨다"(라키토프 1996:273).
(주14)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특히 자동차auto-mobile를 운전하면서 절실히 하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속도감과 자유감을 만긱하도록 하는 자동차는 개인성,
익명성, 중독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운전자의 성격을 보다 조급하고 거칠게
만들어 나가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어느날 자동차를 쓰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두 다리로 걸으면서 공원을 산책할 때 문득 풀꽃같은 것을
눈여겨 보다가 조용히 깨달을 수 있다.
(주15) 한국통신 Freetel, 한솔 PCS, LG Telekom 등 PCS 자본 3사가 1997년 현재
1년간 광고를 위해 매스컴에 투자하는 돈만 해도 모두 800억원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독점적 지위 확보를 위해 출혈경쟁을 하지만 이러한 광고비용도 최종적인
승리자가 가격 매커니즘을 통해 모두 급속히 회수하게 될 것이다.
(주16) 한국에서 이동통신만 해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세대교체가 몇번이나
이뤄지고 있다. 휴대폰(셀룰러)을 1세대라 한다면, 디지털 셀룰러를 2세대, 그리고
개인이동통신 PCS를 2.5세대라 할 수 있는데, 이제 막 PCS 경쟁이 진행 중인
시점에 벌써 3세대인 IMT 2000이 개발되어 시연되고 있다(한겨레신문, 1997. 10.
15). 유행이 빨리 바뀔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빨리 쓰고 빨리 바꾸어
버리자'는 심리가 강하게 작동한다.
(주17) 한국에서 인터넷 사용자는 1993년의 8만 명에서 1997년 현재 155만 명으로
자그마치 20배 가까이 늘었다.
(주18) 이 문제에 관해서는 홀거 하이데(1997) 참조.
(주19) 폴 라파르그(1891)는 물론, 어니 젤린스키(1997)도 "일을 더 할수록 상황은
더 나빠진다"고 한다.
(주20) 수사기관(경찰청, 검찰, 안기부, 기무사)에서 1997년 들어 6월까지
한국통신 등에 요청해 실시한 통신감청 건수는 2,39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28건보다 230% 증가했다(정보통신부). 이중 227건은 일반범죄 수사가 아닌
"국가안보" 목적을 위해 통신감청이 이뤄진 것이다. 안기부와 기무사에서 행한
것만도 400건이다. 그리고 1997년 들어 7월까지 컴퓨터 통신 사용자이름
사용정지와 폐쇄건수는 3,026건이나 되어, 1996년 1년치 2,413건 보다도
많았다(한겨레신문, 1997. 9. 24).
(주21) 여기에 대해서는 홀거 하이데(1997), "노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전제조건",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주최 『미래의 일과 노동』 국제 심포지엄 발표
논문집을 참조.
